최인훈 광장 해설 : '광장'과 '밀실'이 갖는 의미 - 황만복
우리는 언제 죽는지 아무도 모른다. 또, 우리는 어디인가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어딘가로 방황한다. 마음에는 온갖 욕망과 규율 앞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욕망을 깰 것인가. 아니면 그 욕망을 표현하여 사회적인 이단아로 자리잡을 것인가는 아마 인간 최대의 과제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에 나가고 싶어하고, 동시에 자신의 생각과 안위만을 고집하며 살고싶어한다. 세상을 하나의 광장으로 본다면, 밀실은 자신과 주위이다. 물론, 모든 세상이 광장도 아니고 자신과 주위가 밀실이지만은 않다. 이 글에서는 최인훈의 '광장'을 통해 바로 이러한 광장과 밀실의 관계를 알아보고, 나아가 인간이 다다라야 할 점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1. 최인훈 광장 줄거리
최인훈의 '광장'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 이명준은 평범한 대학생이다. 하지만 이명준에게도 불편한 진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아버지는 북한의 주요 인물로서 대남 방송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명준은 이로 인해 매번 경찰서에 끌려가 구타를 당한다. 명준은 이런 생활이 너무나 괴롭다. 이곳이 마치 지옥과 같고 자신이 살고있는 이 세계는 자신이 늘 꿈꾸던 '광장'이 아니다. 따라서 명준은 결국 남한을 떠나 북한으로 간다. 그러나 명준은 그 북한에서도 조차 적응할 수 없다. 북한 역시 하나의 큰 권력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사상과 이념뿐, 자신의 광장은 없다. 그곳에서 명준은 회의감을 느낀다. 자신의 광장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그러던 중 명준은 은혜를 만난다. 은혜를 통해 사랑을 느끼며 명준의 마음은 위로받는다. 전쟁이 일어난다. 명준은 자신의 광장을 찾기 위해 참전한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여인 은혜는 죽고 명준 역시 포로로 잡힌다. 포로 송환 과정에서 명준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한다. 과연 중립국이란 있을까. 명준은 인도의 상선 타고르 호에서 결국 투신자살한다.
▲최인훈, 『광장』, 정향사, 1961 사진출처 구글이미지
2. 광장과 밀실의 관계
무엇이 명준을 죽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광장없는 세상 속에서 드는 회의감 때문이었다. 명준에게 광장이라면 하나의 권력이나 사상으로 얼룩지지 않은 평화롭고 고요한 곳이었다. 하지만 남한도, 북한도 그 광장은 아니었다. 중립국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곳에서도 과연 광장일 가능성이 있을까. 아마 그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2명이상만 모여도 상하관계가 성립된다는 말로 보아, 아마 인간은 '타잔'처럼 사람들과의 교류와 단절된 채 살아가지 않는 이상 그 권력관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밀실은 무엇일까. 명준은 광장을 끊임없이 갈망하는 것과 동시에 밀실을 선택할까 고민한다. 명준 스스로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고,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에게 밀실은 자기 안일한 삶이다. 은혜와 같은 여자와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리며 세상에 대해 크게 바라지 않았고, 모두 순응하며 지극히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명준이 그렇게 살기위하지만 속히 명준을 아무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끊임없이 되물어보는 과정을 통해 명준은 밀실도 광장도 가지 못하고 방랑한다.
밀실과 광장, 무엇이 옳은 길일까. 양자택일을 한다는 것은 무자비하고 폭력적이다. 다시 말해 제 3의 길을 선택할 권리조차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이러한 세계에 살고있다. 권력에 대항할 것인가. 흡수될 것인가. 제 3의 길을 만들기도 하지만서도 그것 역시 하나의 권력에 흡수되거나 대항하는 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밀실과 광장 사이를 오가며 고민한다.
인간들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만들었다는 규율과 법도도 자신을 가두는 하나의 족쇄라고 말하기도 하고, 아니면 그 법도에 순응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언제부터 그러한 틀을 만들며 그 안에서 살게 되었을까. 이것은 아마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서도 발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나를 생각하면 남의 가치가 떨어지고, 남의 가치를 높게 생각하면 나의 자존감이 떨어진다. 더불어 나를 생각하는 순간, 오로지 나에게 피해를 줄 대상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기피하게 되고 이러한 것들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기본적인 법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광장과 밀실이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닌 하나로 묶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밀실은 극히 개인적이고 닫혀있는 공간이라면, 광장은 극히 사회적이고 열려있는 공간이다. 위에 말하듯 자기 자신을 위해, 즉 개인적인 이유가 여러 모여 하나의 담론을 만들고 법규를 만들어 하나의 사회를 변화시킨다면 밀실이 광장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광장이 만들어진 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것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또한 광장이 밀실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둘 사이의 하나의 끈이 연결되어있다. 하지만 이것들이 모두 가능한 것일까. 적어도 명준에게 이 둘은 무자비하고 비폭력적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에 과연 올바른 밀실과 광장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명준이 자살을 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회의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소설가 최인훈(1936년 04월 13일) 사진출처 구글이미지
3. 깨달음의 차이
사실 이 글을 쓴 이유가 단지 회의감에 의한 글은 아니다. 광장과 밀실이 없고, 있더라도 퇴색되고 있다는 것만은 이야기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광장과 밀실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어느 곳에 광장과 밀실은 존재한다. 이것은 찾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다.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우리는 반 광장, 반 밀실을 만들 수 있다.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비슷하게 우리는 분명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것들을 굳이 만들어가며 살아야 할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압력에 살고 있다. 누군가를 욕을하고 설득을 하는 것도 하나의 압력이다. 우리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분명 압력에 이끌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사람은 몇몇에 지나지 않고, 정작 그 몇몇들도 완벽한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결국 우리는 시장이 만들어지거나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그 순간부터 이러한 것들을 얻게 된 것인지 모른다. 광장과 밀실은 매우 중요하다. 비폭력적인 사회와 개인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 이 둘의 관계에 끊임없이 갈등하고 이것의 저울을 무시해 버린다면 우리는 그냥 세상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인간인 것이다. 살아있는 동시에 살아있지 않는 상태, 좀비화 되는 것이다.
최인훈은 아마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도 아닌, 저것도 아닌 제 3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 최인훈을 다원주의라 부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정말 최인훈은 완벽한 다원주의였고, 지금까지 설명한 광장과 밀실 역시 과연 정답일까. 몇 십 년, 몇 백년 뒤 최인훈과 똑같은 성향의 이론이 나온다면 그것은 제 2의 담론으로 최인훈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세상의 정답은 아무런 데 없다. 오로지 가설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최인훈은 물론 모든 문인들이 문학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바로 깨달음. 다같이 깨닫자 라고 끊임없이 소리치는 것이다.
ⓒ글 황만복, 2011
ⓒ사진 강애리, 2010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