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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의 족쇄가 풀린 문학 : 조선후기 문학에 대해 - 황만복
1. 한문문학에서 국문문학으로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한문학은 인정받는 문학이었다. 지배층들은 한문학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뜻은 물론, 그들의 정치적인 사상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한문학을 사용하였다. 한문학은 민중들이 깨우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학이었고, 하루하루를 먹고 살기 바쁜 그들이 한문학을 배우는 것도 큰 한계가 있었다. 사실 이 한문학은 고문에 얽매인 문학이었다. 중국으로부터 전승되어온 문학 양식에 따라 우리의 사상을 덧붙인 표현이었고, 이로인해 한문학은 좀 더 어렵고 복잡한 이론체계를 가진 문학이었다.
양란을 거치면서 지배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민중은 전쟁 중에 도피하는 지배층과 양반층을 보면서 실망을 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성리학을 쇠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경제적 기반인 중인층을 발전시키고 이러한 모습들은 국문문학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학'이라는 이 텍스트에서는 이 현상을 국문문학의 발전 과정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텍스트에서는 국문문학과 한문문학을 하나의 발전단계로 보는 과정에서 한문문학을 비판한다. 또한, 국문문학의 발전된 근거를 개인적인 목소리로 창작을 했다는 점과 미적인 점을 추구한 것을 예로하여 그 근거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오늘날의 문학과 많이 닮아있다.
오늘날의 문학은 개인의 사상적 관점은 물론 시대적인 맥락에 대해서도 표현하고 있다. 또한, 반 예술적인 모습으로 오늘날 문학은 하나의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같은 상상력을 글에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하나의 변화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것을 발전이라는 말을 통하여 그 전의 문학의 양상은 비 발전된 양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문문학 역시 그 시대에서 표현할 수 있는 문자였으며, 만약 그 전부터 우리의 문자가 새로이 있었고, 오랜 기간을 거쳐 정착이 되어왔다면 오늘날 같이 한문문학이 아닌 국문문학이 진작 자리잡아왔을 수도 있다. 다만 한문문학과 국문문학의 차이를 본다면, 한문문학은 중국의 고서에서 차용되는 방식으로 자주 사용되어 왔다. 그로인해 형식적으로 규정이 되어 있었고, 그 내용 역시 어려웠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보다는 지배권 세력들이 향유했던 문학이었다. 그에 반해 국문문학은 처음에는 여성층에서나 향유되어오며 지배권 세력에게 괄시받는 문학이었지만, 양난 이후 중인층을 더불어 평민층의 향유 문학이 되어 개인적 사상까지 문학적 소양으로 표현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물론 이 흐름 역시 지배권의 규율이 흐릿해진데서 발생된 일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2. 꽃을 피우는 운문문학
조선 후기 이전에 운문문학은 한시가 그 주였다. 그 당시 한시는 지배권 세력 중 심의 문학이었다. 개인적 심경이나 사상적인 관점을 노래하기 보다는 성리학적 이념에 대한 논리에 대해서 해석하고 의미를 확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 운문문학은 지배권 세력이 주 향유층이 되었고, 평민층은 이런 운문문학을 향유하기는 꽤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양란 이후, 생산량의 증대와 평민층의 상승, 또한 성리학의 모순되는 이념으로 인한 붕괴를 통해 형식적으로 어렵고, 국가적 문서로서 작용하는 운문문학이 평민층까지 확대되었다.
국문문학이 확대되면서 평민층은 주로 국문문학 중심으로 인한 운문문학이 발전되어왔고, 중인층은 기존에 있던 한문문학을 중심으로 인한 운문문학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중인층들은 시조를 자기표현의 문학적, 음악적 양식으로 표현하였다. 또, 동호인적 취미집단을 형성하여 시조를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였다. 기존의 한시를 사대부들의 관습적이라고 역설하면서 지금의 시조를 훨씬 다양하고 절실한 감흥을 준다고 말하였다.
또한 평민층에서도 가객들이 활동을 하면서 각종 가집들을 활발하게 편찬하였다. 시조창들을 널리 보편화시키는 등 창작과 수용 계층이 늘어나고 그것의 중심 세력이 지배권에서 대중으로 이동하였다. '시조'라는 새로운 창법이 출현하면서 반주 악기 구성이 단순하고 창법이나 평이한 악곡이 18세기에 들어서 형성되었다. 이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시조를 향유하는 층이 되어 시조 속에 개인적 사상은 물론, 나라에 대한 목소리를 풍자하는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 전까지 평시조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사설시조의 방식이 새롭게 출현하였다. 사설시조는 기존의 평시조와 달리 초·중장은 그 일부 또는 전부가 4음보 율격의 절제된 구조에서 벗어난 특징을 보였다. 또한 반복, 부연, 강조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시조의 언어가 보다 평민적인 언어와 익살적이고 풍자적인 목소리로 취하게 되었다. 또한 기존의 시와 달리 감탄사를 적절하게 구사하여 해학적인 필치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사설시조가 평민문학적인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가사 역시 변화하였다. 가사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좀 더 확대되었고, 여성과 평민 작자층이 크게 성장하였다. 또한 주제와 표현방식이 다변화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 있어 기존의 사대부층의 가사도 변화하였다. 사대부층의 가사 역시 체험적이고 구체적인 형식을 증시하는 모습을 보였고, 성리학적 이념과 전원적 삶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기존의 유배가사가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형식을 취했다면 이제는 유배지에서 겪는 고통과 외로움에 대한 표현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또, 외국 기행하는 기회가 잦아져 새로운 문물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방식을 보였다.
규방가사는 기존에는 주로 사대부층 부녀들에 의해 창작되고 향유되었다. 하지만 그 내용과 기록이 매우 미비했다. 하지만 점점 그 층이 늘어나 여성 생활에 대한 윤리적인 규범과 생활 범절에 대한 가르침, 개인과 가정에 대한 체험의 기록 역시 규방가사에 남게 되었다. 시집살이에 대한 고통은 물론, 하층민의 고통스러운 삶과 이를 둘러싼 사회상황을 그려낸 방식을 취하고 있다.
평민가사는 기존에 다루지 못하는 내용까지 다루어 좀 더 다양한 방식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대 사회의 모순과 폭정으로 인한 민중들의 고통을 노래하였고, 추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신랄하게 풍자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남녀 간의 애정을 중심으로 욕구에 대한 좌절, 지연, 성취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다루지 않았던 도교가사와 불교가사가 어느덧 신자들에 의해 구송되고 전파됨에 있어 평민층까지 확대되었다. 따라서 종교 가사들이 민중적인 기반을 확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잡가는 새롭게 발생한 현상인데 이것은 소리꾼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교통권의 확대와 평민층의 세력 확대로 인해 음악적이고 문학적 요소를 결합하여 대중적인 흥미를 유발하였다. 따라서 잡가는 대중적 혼합가요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서정적인 면을 중시하는 면을 보이고 있다. 또한 품격을 중시하는 가사와 달리 품격보다 생활 현장과 경험에 근거한 민요방식과 비슷한 구조로 취하고 있다.
3. 빨라진 발, 그리고 서사문학
서사문학은 18세기 이후로 더욱더 활짝 피었다. 운문문학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서민층들이 사회적으로 기반을 쌓아가고 또 방각본 출현으로 인한 독자층들이 증대하고 유통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서사문학이 전의 형식을 취하였다면 한문문학을 비롯한 서사문학은 좀 더 서사적이고 체험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 또한 전의 구성이 한 개인의 행적을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였고, 중국 고전의 양식을 차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면 후기의 문학은 그 얽매인 틀에서 벗어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성리학적인 이념으로 인한 서사문학이 쓰였다면 후기로 넘어오면서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문학이 주로 양상을 이루었다. 서사문학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평범한 인물이고 그들의 삶은 곧 민중의 삶과 비슷한 양식을 취하고 있다. 물론 영웅적인 소설과 상층적인 인물을 취하는 구조도 보이고 있지만, 이런 서사문학 형식에서는 부패한 관리에 대한 횡보와 모순된 사회구조에 대한 풍자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서사문학은 방각본 문학의 출현으로 인해 더욱더 성장하였다. 서사문학 구조로 인한 평민층의 공감을 확대하고 흥미를 유도하였다. 또한 평민층의 성장으로 인해 문학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쓰이면서 서사문학은 반 예술적인 구조를 향해 가고 있었다. 또한 방각본 소설의 출현으로 인해 서사문학의 독자층은 더욱 더 확대되었다.
또한 남녀사이의 애정을 다룬 작품이 등장하면서 기존 성리학적 이념으로 철폐되었던 것이 개방적이며 민중들이 서로 향유하는 문학 장르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신분적 차이의 극복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기존의 관습을 깨는 구조로 나타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춘향전]에서 그러한 양식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목소리는 신분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난 관념은 아니었다. 작가층은 서사 문학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풍자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을 하였다. 또한 한문학의 영향이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라 문학은 여전히 고전의 형식을 취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존의 작가층이 주로 여성이었지만, 그것이 확대되면서 양반층은 물론 평민층까지 직접 작가층이 되는 구조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구조 모두가 상업적인 유통에 따라 발생했다는 점으로 보아 문학의 발전이 민중의 의식이 확대된데서 시작되었다고 보기보다 문학 자체를 상품화하는 데 있어 발생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시작만 그러할 뿐 문학 창작 자체가 민중의 의식을 공유하고 기존 억압된 질서에 대해 풍자하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민중 스스로 공감과 흥미를 얻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 과정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기존 양반층이 이를 허락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양반층은 서사문학에 대해 '소설배격론' 등 여러 주장을 펼치며 서사문학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 구조 역시 오래된 관습에 얽매인 것으로 보인다. 기존 문학이 운문문학이었으며, 공문서 역시 '시' 구조로 취함으로서 양반층은 그 변화가 결국 기득권을 탈취하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문학은 매우 역동적이다. 이것은 양난 이후 성리학적인 이념이 모순을 드러냈기 때문이고, 이로인한 민중의 의식이 크게 성장하고 경제적 기반 역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Written By Hwang ManBok,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