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생을 즐길 권리가 있다
지금 나는 3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20대는 무엇을 할지, 어떻게 살지 끊임없이 계획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계획은 계획일 뿐이다. 수많은 계획들 중 실천으로 옮긴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 시기에 시간은 정말 소중하다는데, 오히려 나는 그 시간 위에 태평하게 떠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청춘'이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불안함과 위태로움의 낭떠러지로 떠밀려가고 있다. 전력을 다해 헤엄쳐도 모자랄 판에 여전히 나는 권태로움과 무기력함으로 일관하고 있다. 나도 안다. 이런 짓을 반복하다 보면 30대도 금세 흘러갈 것을. 그리고 40대, 50대도 이런 식으로 지나서, 결국 허무한 죽음에 닿고 말 것을.
우리는 주위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살고 있다. 자신의 나쁜 행실에 대해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사람, 들은 이야기를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하는 사람,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철면피처럼 하는 사람. 그중에서도 가장 최악은 이유 없이 상처 주는 사람이다. '네가 뭘 알아?', '네 주제에?', '너는 나이가 있으니까...' 등 어떤 말들은 때때로 우리의 기분을 불쾌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고? 걱정은 개뿔. 걱정이 되면 차라리 위로를 해.
사실 누군가의 조언대로만 사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또, 항상 도움을 받는 것도 자립에 있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김선주, 2010)>에서도 서른이 넘어서 누군가의 도움없이 살 수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꾸짖는다. 그러면서 경제적 독립과 정신적 독립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동의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캥거루족(자립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경제적으로 부모에게 기대어 사는 청년)과 자라족(위기가 생길 때마다 부모의 방어막에 숨어버리는 청년)이 많다. 물론 캥거루족과 자라족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다만, 그들도 아름다운 청춘을 충분히 즐길 권리가 있고, 부모 역시 평생양육이라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권리가 있다.
직업도 구하기 힘든데 어떻게 독립을 해?
높아지는 청년실업률이 캥거루족을 양산하고 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취업하기 어렵다. 그런데 혹시 취업이 아니라 원하는 직업을 구하기 힘든 것은 아니었을까. 연봉도 높고, 근무환경도 좋고, 비전도 있는 일. 그리고 남부끄럽지 않게 제법 멋진 일. 빚까지 내며 대학에 다닌 것은 결국 취업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이제 대학은 엘리트 코스가 아니라 개나 소나 갈 수 있는 흔한 과정이 되어버렸고, 또, 졸업 후에는 취업을 위해 다시 처음부터 공부해야 하는 기이한 구조가 되어버렸다. 만약 좋은 대학을 나오고, 취업 준비도 잘하고, 스펙도 잘 쌓아서, 취업을 하면 우리는 완벽한 독립을 이룰 수 있을까. 그것이 그토록 바라던 인생의 즐거움일까.
아니,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것 같다. 왜 대학을 다녀야 할까. 정말 대학에 나오지 않으면 취업이 되지 않을까. 스펙은 왜 쌓아야 할까. 내가 이 회사를 다니기 위해 태어났을까. 자신의 소중한 가치보다 취업이 그렇게 중요할까. 아니다. 나는 어린 학생들이 시험점수와 과도한 학업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회사를 만들려면 사무실이 필요하고, 누군가는 사무실을 만들어야 한다. 또, 누군가는 그 사무실을 짓기 위한 자재를 만들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직업들의 귀천은 누가 정하고, 누가 만들었을까. 분명 그 어린 학생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 애초부터 멋진 직업이라는 것이 정말 있을까. 모두가 정당한 노동을 하고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데 어떻게 어떤 직업은 멋있고, 어떤 직업은 하찮단 말인가.
예전에 납품을 다녔을 때, 어느 공장의 반장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요즘 공장에 사람이 너무 없다. 그래서 제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몇 년만 고생하면 진급도 빠르고, 웬만한 중소기업 사무직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데, 한국청년들이 지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랬더니 한국 청년들의 일자리를 왜 뺏냐며 욕을 한다. 나도 한국청년을 고용하고 싶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3D업종이라고, 넥타이 매고 에어컨 바람 잘 나오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일거리가 없다고 한탄한다. 정말 넥타이를 매고 돈을 벌면 멋진 일이고, 공장에서 연장 들고 돈을 벌면 힘든 일인가."
예상컨대 청년실업률은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정부입장에서는 어중간하게 대학도 나오고, 어중간하게 스펙도 쌓았겠지만, 혹시 공장에 취업하면 안될까? 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청년정책, 청년청약통장 등 당장 취업하면 혜택이 되는 정책들을 내세우면 일단은 집 근처에 있는 공장, 편의점, PC방에서 일을 하게 될 거니까. 과정이 어떻든 취업은 한 거니까. 현 정부 입장은 자신들의 정책 덕분에 청년실업률이 감소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정말 청년실업률이 감소한 걸까. 글쎄, 아주 나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청년들이 경험을 쌓는 데 있어 기발하고 좋은 방법이다. 다만 서른 중반이 되어가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결코 완벽한 직장도, 직업도 없다는 것을. 결국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죽을 때까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에서는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당당함'을 주장한다. 앞서 언급한 반장님의 말씀처럼 결국,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는 얼마나 자신의 직업에 대해 스스로 당당하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정답이다. 우리의 인생은 누구의 인생보다 이미 아름답고, 다른 사람들이 옳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많은 것들로부터 억압받고 있다. 특히 알 수 없는 빈부격차의 끈과 인맥이 실재한다. 그 결과 우리는 서로 다른 스타트포인트에서 달려야하는 운명에 마주하게 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살기 위해 누군가를 제쳐야 하고, 버티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한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이 책에서 담고 있는 메시지처럼 더 당당해야 한다. 인생은 결코 남에게 좋아 보이도록 포장하는 일이 아니다. 또, 보기 좋게 빚어내는 일도 아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스스로 아름답게 여기고, 당당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 인생이 즐겁지 않으면 모든 것이 즐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