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포스팅은 2010년 도서 『루디(현장 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2010)』에 대한 평론으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루디(현장 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2010)>를 읽고, 문득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복수는 나의 것』 등 그의 영화는 '루디'와 어느 부분 서로 맞닿아있다. 그것은 바로 '처절한 복수'다. 이 소설에도 박찬욱 감독의 영화처럼 복수의 플롯이 깔려있다. 자신을 괴물로 만든 세상에 복수하는 루디와 그런 루디에게 처절하게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결국, 루디와 다를 바 없었던 주인공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2
루디는 잔인하고 냉혈하다. 남의 고통은 물론, 자신이 받는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이코패스 같은 그의 모습은 주인공의 평범한 일상을 엉망으로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위기가 거듭될수록 주인공에게도 변화가 찾아온다. 자신도 모르게 품고 있었던 악마성이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주인공은 루디를 피해 도망갈 기회가 여럿 있었지만 복수를 위해 달아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그것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니었다. 오히려 광기에 가깝다. 그리고 비로소 주인공은 바라던 대로 루디에게 복수를 성공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주인공의 심정은 어땠을까. 통쾌했을까. 무서웠을까. 아니면 흥미로웠을까.
주인공은 백지장처럼 평범한 사람이었다. 뉴욕의 작은 금융회사의 부사장으로, 좋은 대학을 나왔고, 기부도 자주 하고, 세금도 잘 낸다. 확실히 루디와 다르다. 루디는 갓난아기였을 적, 한 괴한에 의해 그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살해당했다. 홀로 살아남은 루디를 향해 사람들은 '신의 아기'라 칭송했다. 그러나 그것은 축복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것은 분명 희망적인 일이지만, 모두가 죽고 홀로 살아남은 것은 오히려 절망에 가까웠다. 결국 루디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지금, 루디는 누군가에게 또 다른 괴한이 되어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나눠주며 괴물로 만들고 있다. 만약 주인공이 루디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루디가 그 괴한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 고통스러운 교감은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나는 악마성에 대해 고민했다. 분명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루디가 살고 있다. 다만 우리의 엄격한 통제에 따라 감금되어 있을 뿐, 그는 늘 자신을 밖으로 꺼내주기를 고대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누군가는 법의 심판을 받는 범법자가 되겠지만, 이것을 그림이나 소설 같은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가들은 대중들에게 칭송받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이 마음을 대화나 행동을 통해 조금씩 표현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3
끝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러닝메이트'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란 마라톤과 같다고 말한다. 맞다. 우리는 모두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시작과 속도는 달라도 결승선은 모두 같다. 물론 1등은 언제나 명예를 얻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완주라는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마라톤은 1등보다 완주가 더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1등이 아닌 완주를 목표로 느리게 달린다면 조금은 여유롭게 주변을 바라볼 수 있다. 또 함께 뛰는 사람들을 조금 더 배려하고 교류한다면 더 많은 러닝메이트들과 오랫동안 달릴 수 있다. 그러나 낙오의 공포가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앞선 사람들을 제치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쩌면 루디는 이러한 공포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나보다 빠른 주자의 다리에 총을 쏘고 싶은 마음. 그렇다면 우리 안의 루디는 누가 만들었을까. 마라톤과 같은 세상인가. 아니면 스스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