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 광장 분석 : 영토화, 재영토화, 탈영토화 관점 ⓒ황만복
1. '광장'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사회는 조화와 평화를 향해 끝없이 달려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화와 평화의 목표점이 아닌 그 반대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현재 사회의 구조 때문이다. 오랜 시간동안 사회를 이루고 있는 시스템은 모순되고 부조리했다. 이러한 문제성은 당대에 해결되지 못하고 축적되어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담론은 협의되지 못하고 서로 간의 갈등과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만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지구에 속한 모든 공동체는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장'이라는 작품은 이러한 불합리한 권력과 모순의 폐해성과 이러한 길로부터 소외당한 사람들에 대해 체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강애리, 2006
최인훈의 '광장'의 시작은 남한에서 대학을 다니는 청년, 이명준으로부터 출발한다. 평범한 대학생으로 보이지만 그는 자주 경찰서에 불려나가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가 이렇게 부당한 대우와 불합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버지의 위치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유명한 혁명가였다. 혁명가의 아버지를 두는 것이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이념이 아니다. 하나의 권력으로부터 생성된 이념이 인간의 생존권을 침해할 만큼의 권리가 있던가. 아니다. 명준은 이러한 불합리한 삶을 살면서 남한의 회의감이 들고, 환멸을 느낀다. 결국 그는 월북을 한다. 자신을 억누르는 사회로부터의 해방이 자신을 자유로베 할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북한 역시 하나의 권력과 이념으로부터 억압된 곳이었다. 그가 늘 꿈꾸던 개방된 광장은 남한도, 북한도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활기차고 정의로운 세계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 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명준에게 '은혜'라는 여자가 나타난다. 은혜는 명준의 허무를 일시적으로 달래주었지만, 자신의 이념에 대한 갈망은 여전했다. 남북전쟁이 일어났고 명준은 전쟁에 참전한다. 이 과정 속에서 은혜가 죽고, 명준 역시 전쟁포로로 잡힌다. 그 곳에서 명준은 포로 송환 과정을 맞게 되는데 그는 남한도, 북한도 거부한 채 오로지 제 3 세계로 가기를 원했다. '중립국'. 하지만 어느 곳이 과연 완벽한 중립국이었을까. 권력으로부터 치우치지 않은,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곳은 어디일까. 인도로 가는 상선에서 명준은 결국 투신자살한다.
명준은 끊임없이 '광장'을 찾고 싶었다. '밀실'로 가는 길은 쉬웠지만, '광장'의 길은 무척이나 어려운 길이었다. 이것은 명준의 갈등이었다. '광장'이냐, '밀실'이냐. '광장'은 사회적인 이상이었다면, '밀실'은 개인적인 안위였다. 광장은 열려있는 장이었고, 밀실은 닫혀있는 장이었다. 만약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의 권력체계들과 불합리한 시스템들을 수용하려 했다면 그는 은혜와의 관계를 갈등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명준은 지식인이었다. 결코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하고, 고통받았다. 결국 이러한 결과가 어떠한 체계를 바꾸어 놓지 못했지만, 그는 죽음으로서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 최인훈 작가의 『광장』 ⓒ구글이미지
2. 영토화, 재영토화만 덩그러니 남은 세계
들뢰즈는 현재 사회의 구조에 대해 세 부류로 지정했다. 영토화, 재영토화, 탈영토화, 영토화는 현재 유지되고 있는 사회이자, 중심부이다. 이 영토화의 특징은 하나의 권력과 이념을 중심으로 고정되어 이다는 것이고, 이에 따라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나뉘어있다. 명준이 살았던 남한과 북한 모두 이러한 영토화가 된 곳이며, 이 곳의 권력과 이념들이 명준을 핍박하였다. 또, 영토화는 정의화 되어있다. 그 영토와는 다른 영토를 영토를 잠식해나가면서 유지해나간다. 이것은 유한한 세계 속에서 폭력과 억압에 대한 이유고, 이러한 불합리하고 모순된 것들이 정의화로부터 거짓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재영토화는 기존의 영토화로부터 벗어난 제 3세계가 다시 새롭게 영토화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가 비로소 막을 내렸고 우리는 그 영토화된 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념과 체제로부터 하나의 영토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 곳은 남한이고, 한 곳은 북한이었다. 결국 하나의 영토화로부터 벗어나 다시 영토화를 만든 셈이다. 결국 영토화건, 재영토화건 이것은 하나의 권력으로, 정의 혹은 재정의되는 것이다.
탈영토화는 무엇일까. 하나의 권력이나 정의로부터 벗어난 세계다. 중심이 없는 세상, 중심으로부터의 외압이 없는 세계, 호모 노마드적 삶이 이것에 포함된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이 탈영토화된 곳을 말할 수 없다. 밀집되어있는 곳은 하나의 단체가 되고, 단체 속에서 하나의 중심이 등장하며, 그 중심은 자신의 권력과 기반을 위해 정의화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로부터 완벽히 벗어난 세계는 찾을 수 없다. 다만, 영토화로부터 벗어나고 재영토화로 가는 그 짧은 이행기, 그 중에서도 이러한 이념과 정의가 없는 그 찰나의 순간이 탈영토화는 아닐까.
명준이 꿈꾸던 사회는 바로 이 탈영토화된 사회는 아니었을까. 무엇인가를 갈등하지 아니하며, 스스로 선택하며 살 수 있는 세상. 관습과 정의없는 곳. 또한, 이것이 자신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로 뻗어나가길, 명준은 그런 큰 꿈을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남한과 북한, 두 나라에서는 결코 그 꿈을 펼칠 수는 없었을까.
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의 이념의 대립이 심했다. 남한의 경우 특히 경성사람들과 같은 경우 자본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했다. 이것이 무엇을 초래했을까. 데리다의 해체론에 의하면 데리다는 이 현상을 '정의에 미쳐있다'고 표현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과적 불평등을 유지하려는 모든 것과의 전쟁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사물에 깃들어져있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저버리고 단지 하나의 가치에 매료되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남한의 사회의 경우, 이 사물은 바로 자본이다. 자본에 눈이 멀어 하나의 의미로서 자리잡았으니 명준이 과연 이 치열한 남한의 사회에 만족할 수 있었을까.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공화국이라 표방하는 곳이 민주주의적 삶이 모순된 채 하나의 권력과 정의에 꼭두각시놀음하는 곳과 다르지 않았다. 개개인의 삶은 단지 하나의 도구와 수단이었다. 이념으로 얼룩진 북학은 자본으로 얼룩진 남한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따라서 명준은 이 북한의 사회도 적응할 수 없었다.
ⓒ강애리, 2004
3. 과연 광장은 존재하는가
명준이 꿈꾸던 '광장' 혹은 '중립국'은 과연 존재하는가. 현재 이 세계의 흐름으로 보아 이제 멸종했다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다. 이미 모든 곳은 영토화된 곳이고, 그곳에서 벗어나 다시 건설한 재영토화된 곳일 뿐이다. 남은 것은 단지 유한한 자원을 앞에 두고 영토화들끼리의 분쟁과 갈등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벗어나는 길은 지성을 버린 수용이나 창조에 가까운 대변혁이나 명준이 택한 죽음뿐이다. 명준은 죽음을 통해 자신이 가고자 한 세계에 가고자 한다. 그곳이 자신의 안위를 위한 곳인지. 아니면 '광장'인지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른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가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죽음으로서 광장을 찾았건, 아니면 안위를 찾았던, 그 갈등에 대한 해답을 구했다는 것이다. 호모 노마드의 삶처럼 자기중심을 잃어버린 명준의 모습은 그 시대적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또 현재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그는 공감하고 연민하게 만든다.
ⓒ황만복 서 평, 2012